
4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고, 기온도 뚝 떨어지고, 게다가 월요일에는 설상가상으로 수업 지각해서 뛰다가 발을 삐끗해서 며칠째 절뚝거리면서 걷고 있다. 멍들지도 않고, 부어오르지도 않고, 눌러도 안 아픈데, 그런데… 똑바로 걸을 수가 없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계단을 보면 흠칫하게 되고 마음대로 걷지를 못하니 삶의 질이 한순간에 확 나빠지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면 삶의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들이 참 별거 아니다. 그런데 모든게 당연하게 주어진 거라 느껴져서 아무 감정 없다가, 뭔가가 조금이라도 사라지면 급격히 불행해지는 걸 보면 행복해지기는 글렀다.
요즘 마음이 계속 분주하다. 이번 학기에 수업 자료를 수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구체적으로는 수업 자료에 R 명령어를 집어넣는 작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한번도 이것을 배운 적이 없다. 혼자 책 빌려서 독학하려니 집중도 안 되고 힘들었다. 그래도 돈 받고 공부하는 꼴이니 더 열심히 하자며 인내해서 10시간 정도 투자해서 내가 통계학 지식이 부족해서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 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혼자 한번 쭉 훑어보면서 직접 입력도 해보고…약간의 ‘감’이라도 익혔다. 어차피 수업자료에는 정말 간단한 수식만 집어넣는 것이므로 대충만 이해해도 상관 없을 것 같긴 한데 오늘 처음 있는 회의에서 약간 자괴감이 들었다. 교수님은 무슨 프로그램 무슨 수식을 쓰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다 처음 듣는 거였다. 알고보니 수업자료는 워드나 파워포인트로 하는게 아니라 Latex (영어로는 라텍, 레이텍이라고 발음하는 것 같고 독일어로는 라테흐라고 해서 처음에 어떻게 쓰는건지도 몰랐다….막상 이름을 알고나니 계속 라텍스라고 하고 싶다. 우리 집 메트리스 라텍스인데…내가 아는 라텍스는 그게 전부인데…ㅠㅠㅠㅠ) 라고 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거였는데 명령어 입력해서 하는거라서 직감적인 프로그램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수학 수식이나 도표를 만들기에는 편해서 워드보다는 선호하는? 논문을 쓸 때도 자주 사용된다고. 아 이건 어느 세월에 익혀…….;사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이번에 석사를 마친 다른 경험 많은 친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그것까지 하기를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어중간하게 끼어있는 느낌이라 왠지 슬펐다. 저번 방학때도 이 친구와 같이 일했기 때문에 수다 떨면서 많이 친해졌는데 별 지식이 필요없는 단순업무가 아니라 기본 수준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상황에서 같이 협업을 하려니 내가 너무 민폐인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둘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일방적으로 그 친구가 다 하게 되면 너무 미안하잖아…..게다가 그 친구도 이 프로그램의 원리를 알기만 하지, 본인 스스로도 잠깐 써보다가 너무 번거로워서 관뒀다는데 흠..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이번 학기에 신경써야 할 과목들도 많고, ‘나는 충분히 이런 일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점수로 여기저기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이라 괜히 마음이 무겁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고, 내가 나이는 좀 있어도 새로운 전공을 시작한 거고 이제 기껏해야 3학기짼데… 모르는 게 많은 건 너무나 당연한건데, 나를 멍청하게 볼까봐 편하게 질문도 못 하고 혼자 낑낑대고 있다.. 내가 가장 적합한 사람도 아니었을텐데 나에게 일을 말그대로 일부러 맡겨’줘’서 대학교에서 용돈벌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좋고, 앞으로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필요할 것들을 미리 돈 받고 익히는 것이니 분명 좋은데…한편으로는 이 시간에 해야할 다른 일들이 너무 많아서 괜히 한다고 했나 후회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있는 시간 쪼개서 열심히 해야 할텐데ㅎㅎㅎㅎㅎ 현실은 수업 듣고 집에 와서 소파에 누워서 몇시간이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인터넷만. 발 아프다는 핑계로 소파와 물아일체 되어서 빈둥대고, 춥다는 핑계로 핫초코나 녹차라떼 흡입하면서 점점 포동포동 돼지가 되어가는 느낌. 아주 그냥 축축 쳐진다. 하지만 이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발도 멀쩡해지고 마음껏 공부할 시간이 확보되면 또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공부 안 하려고 하겠지? 가끔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하는 마인드로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애초에 공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공부하는데 그게 과연 적성일까 싶다. 근데 정말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고 즐기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있나? 정말 극.소.수.이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싶다ㅠㅠㅠㅠ) 마음껏 징징댔으니 오늘부터는 다시 정신차리고 새 출발을 하자..
Blog Comments
lividk.com
November 18, 2016 at 3:31 pm
ㅎㅎㅎ 잘 하고 싶으니 스트레스 받는 거 같아요. 할 게 너무 많을 때 그러다보면 스트레스를 더 받으면서 미루게 되고요. 제가 간혹 그 procrastination의 구루같이 굴어서 참 공감합니다. ;) 급한 마음이 들 때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 해나가다보면 또 진전이 이뤄지니 마음을 조금씩 비우면서 해보세요~ R 하고 친해지는 것 오래 걸리는 거 같아요. 좀 친해졌나 싶으면 또 아니고… 다 그러니까 그 또한 너무 마음쓰지 마시고요! :)
Sue
November 18, 2016 at 4:50 pm
감사합니다. 요즘 마음도 제 주변환경도 어수선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어제는 깨끗하게 집도 좀 치우고, 해야 할 일도 세분화해서 적어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작은 것부터 해나가면서 약간의 성취감도 느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끝까지'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Mina
November 19, 2016 at 8:21 pm
Latex라면… 지난 번에 한 번 페이스북에서, 제 후배중 한 명이 컴퓨터 공학과 과제를 Latex로 제출해서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던 그.. 그 프로그램인 것 같네요. 아마 맞겠지..(..)? 할 일이 많아서 빈둥빈둥 하는 것 같아도 수수씨는 결국 해야할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란 걸 전 알기에 걱정하지 않을래요(!?) ㅋㅋㅋㅋ 결국 다 잘할 거면서 아잉! 여러모로 축축 쳐지고 힘들어도 그래도 힘내용 :)) 힘들땐 제게 연락하면 제가 어화둥둥 해드릴게요 :DD
Sue
November 20, 2016 at 1:52 am
오!! 아마 맞을 거예요. 공학이면…뭔가 수식이 많을테니까….ㅋㅋㅋㅋ하하 저 '아잉'은 뭐죠. 애교인가요ㅋㅋㅋㅋ응원 고맙습니다. 진짜 힘이 나네요ㅠㅠㅠ어화둥둥 좀 필요할 것 같은 학기예요. 아마 미나씨도 그렇겠…죠..?(저주 아님) 우리 서로 우쭈쭈 해주며 힘냅시다 헤헷♡
가비
November 24, 2016 at 11:49 am
맨날 염탐하는데! 오랜만에 댓글로ㅎㅎㅎ
다리 얼른 낫기를ㅠㅠ 진짜 압박붕대…많이 필요해요ㅠㅠ
(이럴 때 남편분을 많이 부려 먹으라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fantastic beats n where to find them 제목도 너무 길다ㅋㅋㅋㅋ 이거 완전 강추합니당
꼭 봐요 꼭꼬꼬꼮꼬꼬꼬꼬꼬꼮
Sue
November 24, 2016 at 6:12 pm
지난주는 계속 안 좋았는데 다행히도 지금은 거의 다 나았어요! 아직 차마 발목을 막 꺾어보지는 못하겠지만ㅋㅋㅋ 오 영화 재미있어요? 원래 오늘 볼 생각이었는데 잠을 많이 못 자서 지금 헤롱헤롱 상태라 포기…다음주에 시간되면 가야겠어요 헤헤 호불호가 많이 갈려서 살짝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니 다시 기대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