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pinterest
독일에 정착한 지 일년이 되었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도 최근 몇 년간 독일을 여러번 왔다갔다 했고, 6개월 또는 1년 단위로 거주하기도 했기에 독일에서 사는 일이 새삼스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그러니까 이 ‘1주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이번 학기를 거치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는데 이 기회에 한번 정리를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이 공간에 적어본다.
임시거주자와 시한부 인생
최근 몇 년은 임시거주자 또는 여행자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는 그 공간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 명백했다. 시한부처럼 각각의 공간에서의 내 삶은 6개월, 1년,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면 좋은 점은 그곳에서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그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점이고, 나쁜 일들이 발생해도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쁜 점은 ‘언젠가는 떠날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는 것이고,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과 반대로 삶에 소홀해지는 측면도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시적인 마음가짐들이 결코 ‘나 자신’의 진실된 모습은 아니라는 것. 그동안 독일에서 지낼 때 내 마인드는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여유롭게 살자.’였는데 더 이상 독일이 내게 임시거주지가 아닌 ‘정착지’가 됨으로써 그러한 마음가짐이 더 이상 유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나는 원래 매사에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경향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약간의 우울증은 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경쟁 마인드가 이미 수년간의 한국생활로 인해 내 몸에 배어있어서 (아무리 주변인들은 내가 독일인 같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없이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성취주의적인 성향이 자꾸 고개를 들었는데, 그런 내 모습이 싫으면서도 지금 내게 분명히 필요도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여유조차 강박이 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노는, 균형잡힌 웰빙라이프를 해야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알게 모르고 나를 괴롭혔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그것 또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사회적 강박이라기보다는 순전히 내 내면의 문제였지만.
꿈의 부재
독일 교환학생을 다녀온 이후로 나의 가장 큰 목표는 독일이민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이전에, 내 어렸을 적부터 가장 큰 소원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성공해서 내 이름을 이 세상에 남겨야겠다는 야망도, 돈을 많이 벌어서 펑펑 쓰거나 사회에 기부해서 가난한 이들을 많이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여기서 핵심은 ‘돈을 많이 벌어서’에 있다) 한 적이 없다. 더 이상 서울대 나오면 어디든 취직되는, 학벌이 곧 출세의 길인 시대는 지났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람들 (주로 ‘어르신들’) 머리에는 ‘성공을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각인되어 있고, 반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려고 한다’는 잘못된 ‘역추론’이 만연한 곳에서, “지금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왜 욕심이 없니”라는 직간접적인 시선을 많이 받아야 했다. 또는 반대로 “너는 참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깨어있다”라는 낯간지러운 칭찬도.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욕심을 억누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가장 큰 꿈’은 ‘행복한 결혼’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성공에 대한 욕구,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누군들 그런 게 없겠나) 그걸 최근 들어 깨닫게 되면서 환경이 나에게 주는 영향이 그렇게 컸구나 싶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똑똑하다 소리 들으면서 인정을 많이 받았으나 이미 그때부터 그게 한국사회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지 느끼고 있었다.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회사 다녀봤자 하나도 안 행복해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뭘 해야 할까 끊임없이 고민해야했다. 그러나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상황에서는 그저 막연하게 주어진 일, 즉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그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오랫동안 방황했는데 한동안은 꿈의 빈자리가 막연히 ‘독일이민’으로 대체되면서 견딜 만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는 독일이민도 해결되고 결혼생활도 너무 행복한데 그게 끝이 아니라 내 삶은 계속 되는 것이기에 ‘꿈’ 항목이 다시 빈칸이 되면서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역시 ‘직업’, ‘일’이라는 항목이 배제되면서 삶의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 부분은 ‘언젠가는….’이라는 수동적인 태도로 마냥 비워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시간들이었달까. (물론 시간이 흐르고 직업적 성취를 느끼는 날이 와도 결국 또 다시 허무함이 밀려들어오겠지. 인생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늘 진행형이니까.)
경쟁적 사고의 양면
나는 그저 완벽주의 때문에 열심히 공부할 뿐이고, 남보다 잘하고 못하고는 내 동기부여에 큰 영향을 안 준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수학이나 영어는 고등학교 때부터 내 관심 분야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잘하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수학을 딱히 못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워낙 잘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보니 자연스레 ‘나는 수학을 못해. 나는 수학이 싫어. 수학은 재미없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문과임에도 불구하고 수학성적이 가장 중요한 대학입시의 아이러니로 인해 수학공부를 가장 열심히 하기는 했다. 그런데 독일에 오니 수학천재가 된 느낌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일부 수학과목 조교들까지도 (한국)중학생이 알아야 할 수학적 기초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 ‘하면 되겠는데?’하는 근자감이 막 생기면서 수학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 최근에 수학 관련 일을 제의 받으면서 괜히 수학과 수업을 들어야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어느 순간 다른 학과 수강편람을 검색하고 있는 내 모습에 피식- 그게 말이 되니…하고 속으로 웃었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는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반면 영어는 여전히 해야 하는 걸 알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이다. 독일인들은 영어를 기본적으로 다들 하니까. 물론 그렇게 중요하기에 오히려 더더욱 해야 하겠지만..휴.. 아무튼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다가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니 좋아하게 되는 내 모습에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남과의 비교’, ‘경쟁적 사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나타나는 정반대의 증상으로는 ‘자격지심’이 있다. 두 번째 학기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아마도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고, 평생을 싸워나가야 할 생각, ‘내가 잘해봤자 나는 외국인. 나는 아무리 해봤자 절대 원어민처럼 독일어를 할 수 없을 것. 그리고 나는 무조건 채용이든 뭐든 불리하겠지. 내가 배우는 것이 완전 기술만 다루는 공대 분야도 아니고 졸업생이 넘쳐나는 그저 경제/경영이니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인데 이러한 생각이 내 발전에 도움이 될까? 아닌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생각. 외국인이니까 더더욱 치열하게 ‘스펙’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뭐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성적이 독일에서 그렇게 중요할까, 성적 좋아봤자 나는 외국인이라 밀리는 거 아닌가, 독일은 실제 경험이 더 중요한데 그러면 나는 대학 다니면서도 일을 찾고 인턴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러면 또 성적이 떨어질 텐데…등 온갖 고민 걱정.
반대로 ‘여유로운 삶’을 찾아서 독일 왔는데 왜 또 성적에 집착하고 갑자기 뜬금없이 한국에서 집착하지 않았던 ‘성공’에 대해서 집착하는지 반성하면서 더 많이 놀러다니고, 더 많이 여유 부려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고민들을 같이 병행했다. 사실 수험생처럼 공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교환학생 시기를 제외하고 이렇게 평상시에 많이 여유 부린 적도 적으면서 뭔가 ‘더’ 여유로워야 할 것 같은 압박감. 게다가 엄마는 계속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하루의 일부분은 요리에 투자하고 남편과의 삶을 즐기면서 공부에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더 스트레스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실제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다른 것들을 ‘양심상’ 하지를 못한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게 될지언정, 공부 외의 다른 일들은 건드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름이다 보니 이런저런 축제가 엄청 많고, 학생이 아닌 지인들이 왓츠앱 단체방에 여기갈까 저기갈까 제안하고 페북 이벤트 만들어서 초대하고 그럴 때마다 ‘공부해야 해서 못가’라고 하기도 매번 민망했다. (독일인들은 시험기간에도 그런 데에 잘만 가더라..) 시험기간에는 놀러가지도 않고 집도 엉망이고 그냥 내 모든 삶이 엉망진창이었다. 과 특성상 평가가 과제가 아니라 전부 시험으로 진행되기에 시험 한두개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한달 내내 시험을 봐서, 준비기간까지 해서 두 달 정도를 시험기간이라 생각하고 죽은 듯이 살게 되는. 그때는 나를 챙겨주는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이게 남편한테 무슨 민폐인가 싶은 마음이고 그래서 차라리 혼자 살 때가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이런 생활을 몇 학기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복잡하고 여러모로 내 스스로가 한심해지면서 우울해졌다.
그래서 결론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런 식의 내적 갈등은 결국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임시거주자가 아니다. ‘여기서의 삶은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필요가 더 이상 없다. 시한부 인생 아니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나답게’ 사는 것이다. 이래야한다, 저래야 한다, 사회가 만든 기준인지 내가 만들어낸 기준인지도 모르는 그런 애매한 잣대들을 끊임없이 나한테 들이대는 일을 멈추고, 그냥 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또는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내 내면에 나타나는 여러 반응들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 우울, 분노 등 부정적 감정들을 억누르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애써 긍정적으로 포장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 내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고,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독일 온다고 내 자신이 변하나, 나는 나인 것을. 독일에서 산다고 여유로워야 하나, 독일의 삶이 그냥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덜 각박한 것뿐이지. 그리고 원래 외국인의 삶은 조금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독일인들은 나보다 훨씬 비판적이고 날카로운데 사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웰빙이 보장된다고 무조건 ‘아~ 독일 너무 좋다~ 여유롭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그래서 ‘그래도 너는 독일에 있잖아.’라는 멍청한 생각은 가뿐히 무시하고 싶다. 내 삶이 행복한 이유가 ‘그래도 한국을 떠났으니까’라는 것이 되지는 않도록. 그게 행복한 유일한 이유라면 너무 불행한 것이니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비판하고, 우울할 때는 마음껏 우울해하고, 그냥 내 원래 성격대로 살아야겠다.
……라는 것이 독일살이 1년의 현재 소회. 뭐 생각은 또 끊임없이 바뀌겠지만. 이렇게 다짐해 놓고 수없이 원상복귀하겠지만. 그것 또한 나의 모습이니..
Blog Comments
Mina
September 12, 2016 at 8:42 am
제가 쓴 글인줄 알았네요. 너무 격한 공감에 어느 내용부터 언급하며 댓글을 달아야할지도 모르겠는 이 묘하고도 복잡한 심경.
Sue
September 12, 2016 at 1:02 p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