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번역가가 유부남 농담을 언급하며 질 나쁜 모독이라고 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으며 정말 깊이 공감을 했는데 결혼뿐만 아니라 육아도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결혼과 육아에 있어서 늘상 따라다니는 말들이 있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결혼하면 엄청 싸워. 지금을 즐겨” 또는 “결혼? 하지마.” 하는 말들. 결혼하고 좋다고 하면 “신혼이라 그래. 애 생기고 나면 지옥이야.” 임신했을 때는 “배 속에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때야. 애 태어나면 그때부터 지옥이야.” 신생아 시기에는 “누워 있을 때가 좋은 때다. 이제 뒤집기 시작하면 지옥이 펼쳐져.” 그리고는 기어다닐 때, 걸어다닐때, 떼 쓸때, 더 나아가서는 사춘기.. 그냥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이 더 안 좋을 수 있으니 지금이 “차라리” 낫다는 그런 말들이다. 살면서 펼쳐질 지옥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신기한 일이다. 다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나? 사실 아직도 그런 말을 왜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러면 자신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이런 일을 겪은 자신들의 무용담인가? 왜 점점 안 좋아질거라고 장담하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의 행복을 부정하는 걸까? 사실 나도 무심결에 그런 말들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신혼 시기에 너무 행복하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너무 보기 좋았다. 그러면 나도 “그쵸? 결혼 너무 좋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 결혼하고 나서 내 인생은 너무나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신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이가 생기기 전이 신혼이라면 나는 약 5년 반의 신혼생활을 했다. 그런데 늘상 아직 애가 없어서 그렇다는 얘기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와 결혼하니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왠지 누군가는 “그거 아직 애 없어서 그래”라고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애를 낳고 키우고 있다보니 알겠다. 아이를 낳고 나면 부부 관계는 확실히 변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게, 견고하게 변할 수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말할 수도 없다. 결혼도 너무 좋은데 아이가 있는 삶은 상상초월의 행복을 가져다준다.
힘든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아 그래? 나는 너무 좋은데”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데 분위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그게 무덤인 것처럼 얘기하는 그런 풍조는 너무 싫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육아가 힘들다고 얘기하면 당연히 공감이 간다. 나도 겪어봤으니까. 그러나 육아의 힘듦을 토로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막연하게 무조건 힘들지 하고 먼저 얘기하는 것은 왠지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이제 막 결혼했는데 그냥 뜬금없이 “근데 결혼생활 힘들지? 시월드 심하지?”라고는 잘 안 하지 않나.
최근에 해외에서 아이를 낳은 지인이 이제 아이가 태어난 지 2주 정도 되었는데 육아가 생각보다 할만하다고 하는 글을 썼다. 남편과 함께 아기를 돌보면서 사랑과 신뢰가 더 깊어진 것 같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공감이 갔다. 글을 보는 순간 “아직 뭘 몰라서 그렇지”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와 벌써 이렇게 느낄 정도면 정말 육아 행복하게 잘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아직 세 돌도 안 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지만 아이가 태어난 직후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새벽에 혼자 애 보면서 수유, 기저귀갈기, 유축, 유축기 세척을 해야 했던 게 레전드…) 그런 멘탈이라면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잘 키우겠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몸은 힘들었지만 생각보다는 할만한데? 싶었다. 다른 블로그에서도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넣는 글을 많이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할만하다고. 왜 그렇게 겁냈는지 모르겠다고. 그분도 해외 살아서 산후조리 혼자 하신 분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때 그런 글을 쓰지 못했을까?
지인과 그 블로거의 글을 보고 느낀 점을 나에게 적용을 해보니 ‘아직 애가 어린데 내가 육아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이 있나’ 싶은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다. 벌써 사춘기 자식을 키우고, 아니면 성인인 자식을 둔 부모에 비하면 나는 햇병아리 부모이지만, 그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키웠던 옛날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까? 그때의 자식들을 기억할까? 지금 이 순간의 아이의 모습과 내 감정은 이 순간에 가장 생생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진실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이때는 자신만만했는데 살아보니 바뀔 수도 있는 것이고, ‘그때는 뭘 몰랐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다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테니, 지금 느끼는 그대로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육아는 너무 힘들다’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졌다. 물론 육아는 힘들다. 하지만 육아가 힘들다고 얘기해도, 아이를 사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 전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육아는 그냥 못할 짓이 된다. 육아를 그냥 ‘애 보면서 쉬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보다는 육아의 노고를 인정해 주는 것이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육아를 하는 입장에서는 그 사고방식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그런 사고방식은 아이를 짐짝 취급하는 것이다. 나도 물론 아이를 남편한테 맡겨놓고 ‘자유부인’이 되는 날은 기뻐했다. 그러나 ‘또 내가 돌봐야 해?’라고 하는 것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귀찮고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 6개월, 아니 1년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마리의 연약한 짐승 같다. 너무 귀엽기는 하지만 상호작용은 거의 없고, 혼자 하루종일 애를 보고 있으면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애를 돌봐야 하는 것이고, 그게 나라면, 어차피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나 대신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애를 전담하거나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그러나 독일은 그런 형태의 도우미가 없다ㅠㅠ) 조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상황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내가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짐짝 취급할 것이면 아이를 왜 낳았을까? 내가 낳고 싶어서,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닌가? 그때마다 “그 시간을 즐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야.”라고 했던 독일 육아 선배의 마음을 되새기며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려 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정말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누군가는 자기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상황은 내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 내가 괴로운 것은 상황 자체보다는 내 생각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편이 혼자 아이를 보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서 “어땠어? 힘들었어?” 라고 물어보고는 했다. 사실 그 질문에는 ‘육아 힘들지?’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었다. 남편은 그때마다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았다고 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반성했다. 왜 무조건 힘들거라고 나는 생각을 했던 걸까? 그냥 태연하게 할 일 한 것처럼 아이를 볼 수는 없는걸까? 남편은 출장이 거의 없지만 간혹 외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늘 긴장됐다. 아무래도 하루종일 100% 혼자 아이를 케어한 상황은 거의 없어서. 그런데 오히려 그런 날 육아가 훨씬 더 수월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랬던거다. 어떤 상황이든 태연하게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육아뿐만 아니라 살면서 뭐든지 그렇게 하지 않았나? 물론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지만 그냥 묵묵히 하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부정적인 의미부여를 멈추니 모든 게 훨씬 수월해졌다.
이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보자. (그리고 실제로 그런 생각으로 육아를 하기도 했다. )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행복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이제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행복했다. 무슨 일이 생길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었는지.. 처음 아이를 집에 데려왔을 때는 드디어 집에 와서 행복했다! 남편과 아이를 둘이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처음부터 아이 옆에서 우리 힘으로 직접 키우는 게 정말 좋았고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오지랖과 잔소리를 안 들어도 돼서 좋았다. 내 아이는 내가 가장 잘 안다는 확신이 생겨서 좋았다. 남편이 집안일 다 하느라 고생은 좀 했지만 그래서 ‘내가 여자라서 불공평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고 육아도 하는 남편이 고맙고 짠했다. 이것이 남들이 말하는 동지애구나! 물론 아이가 통잠을 자기 전까지는 수면부족으로 인해서 신경이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짬이 생기면서 시간이 나면 같이 자기도 하고 남편과 같이 드라마도 열심히 보면서 아이를 가지기 이전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모유수유에 성공해서 아이 트름을 거의 안 시켜도 되어서 좋았고, 게워내지도 않아서 빨래도 많이 안 해도 되어서 좋았고, 분유값도 아꼈다! 그 덕분인지 아프지도 않고 잘 커줘서 좋았다. 사랑스러운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덤.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하니 살만해졌다. 아이가 뒤집는 것, 이유식 먹기 시작한 것, 앉는 것, 걷는 것, 옹알이하는 것,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성장급등기나 이앓이로 인해서 패턴이 무너지면 힘들기는 했다. 짜증내는 아이를 붙들고 나도 짜증을 내기도 했고, 계획했던 것들이 어긋나면 화도 나고 속상했다. 그 계획했던 것들이 자격증이나 시험공부가 아니라 ‘아이가 잠들면 설거지하고 잠시 쉬어야지’라는 단순한 것들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무너졌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도 많이 성장했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생활패턴이 어느 정도 잡히고 아이도 이제 한마리의 연약한 짐승이 아니라 작은 인간이 되었을때 가치관에 대한 고민들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늘 했지만, 처음 1년은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보니 그런 고민은 다소 추상적인 느낌이었고, 사실 한가하게 그런 고민을 할 정신이 없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로 연결이 된다. 지난 10년간 멈췄던, 행복한 삶에 대한 고민을 정말 진지하게 하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회복되고 내 삶을 긍정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이건 나에게는 매우 큰 변화였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말할 것도 없다. 아주 어릴때는 그냥 인형 같아서 보고 또 봐도 보고 싶고, 점점 크면서 의사소통이 되면서 함께 노는 게 점점 재미있어진다. 같이 나란히 누워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내 볼을 쓰다듬으며 “엄마 쪼아!”를 외치고, 내 손을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사랑스럽게 쓰다듬고, 집에 들어오면 쪼르르 달려와서 신나게 반겨주고, 어디 부딪혀서 다치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호 불고, 엄마 반응이 재미있어서 괜히 엄마 싫다고 장난치고 깔깔 웃고.. 아이로 인해서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할 때도 많지만 아이와의 포옹 한번으로 그 모든 게 다 괜찮아진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부모가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사랑이 훨씬 크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세상의 전부로 아는 아이 때문에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매 순간이 황금기이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좋을 것이다. 지금이 별로라서가 아니라, 그냥 매 순간이 너무 좋아서. 아이가 성장할 때마다 지옥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아이가 성장할 때마다 새로운 천국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우리 아이는 참 순하다. 내가 보기에도 이보다 순할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순하고 몸도 마음도 참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러니 예민하고 힘든 아이를 둔 부모가 보기에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앞으로 아이가 어떻게 변할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사춘기는 사실 두렵다. 그러나 실제로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친근하고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봤다. 그러니 지금은 걱정하지 않으련다. 아이를 낳으면 부부 사이가 나빠진다는 말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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